구정은
* 2025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학술제에 기고한 글입니다.
목차
I. 서론
II. 이론적 배경: 집단기억의 장소성과 시각화
III. 지워진 것을 재조명하는 소환으로서의 동시대 예술
1. 해외 — 장소를 통한 집단기억의 재가시화: 볼탄스키·보디치코
2. 국내 – 장소를 통한 집단기억의 재가시화: 정은영, 박경근, 조민석
IV. 결론
I. 서론
장소는 단순한 배경이나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기억을 저장하고 재구성하는 심리적·사회적 장치로 기능한다. 특히 동시대 미술에서 ‘장소’는 과거의 기억을 호출하고 재서사화하는 중요한 매개로 작동한다. 이러한 장소를 기반으로 한 예술은 개인적 회고를 넘어서, 다수의 시선이 축적된 공공기억의 형성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본고는 사라져가는 장소에 대한 예술적 응시가 단순한 복고적 감상에 머무르지 않고, 지워진 기억을 새롭게 재배치하고 쓰기 위한 ‘염원’의 표현임을 밝히고자 한다. 과거의 역사 속에서 지워지고 소외된 개인에 주목한 기억 연구의 담론이 사회적 집단의 영역에서는 어떻게 해석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동시대 미술계에서 다루는 집단적 공공기억의 시각화와 철학적 재구성 형태를 분석하며 공공 기억이 어떤 방식으로서 예술 매체로 전환되는지 주목하고자 한다.
II. 이론적 배경: 집단기억의 장소성과 시각화
공공기억의 정의에 앞서, 기억은 본질적으로 ‘시선’을 통해 구성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도록 만드는 가에 따라, 즉 기억을 생성해내는 주체에 따라 기억의 구조는 달라지며, 이로 인해 어떤 시선은 주류 역사에 편입되고, 어떤 시선은 비주류로 취급되어 결국 지워진다. [1] 1896년 앙리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이 저서 [물질과 기억]을 통해 기억의 본질을 분석해내며 기억의 유형화와 학문적 확립이 이루어졌다. [2] 베르그송 이후로 현상학과 심리학에 방대한 영향을 미친 기억 이론은 20세기에 접어들며 연구가 활발해졌다.
특히 베르그송의 한계로 지적되었던 집단적 기억의 부재, 즉 개인의 습관 기억과 순수 기억만을 다룬 베르그송의 학문을 후대의 사상가들은 집단 기억 개념을 정립하며 재해석했다. 집단 기억 개념을 정식적으로 이론화한 인물은 사회학자 모리스 할브바흐스(Maurice Halbwachs)로, 그는 베르그송의 개인 기억 모델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며 자신의 집단 기억 이론을 확립했다. 기억이 개인 심리의 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틀을 형성하며 기억이 구성되는 것이라는 할브바흐스의 주장은 후세대 집단 기억 연구의 큰 축이 되었다. [3] 집단 기억을 연구한 후대 사상가 중 특히 역사학자 피에르 노라(Pierre Nora)는 기억을 장소와 결부시켜 설명하고자 한다. 노라는 ‘기억의 장소’(Lieux de Mémoire) 개념을 주장하며 기억의 형성에 있어 장소의 의미를 부각시킨다. [4] 특히 그는 현대사회에서 기억이 사라져가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물리적 상징적 장소가 어떻게 공동체 기억으로서 형성 및 저장되고 재구성되는지 파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기억의 장소’ 개념을 제시하는데, 노라는 그 정의를 ‘기억이 사라져버린 시대에 기억이 응축되어 있는 구체적 지점’으로 정의 내린다. 그에게 있어 기억의 장소는 기억과 역사를 구분 짓는 기준이자 두 개념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기억과 역사는 각각 반복적이고 선형적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기억이 공동체 정체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반면 역사는 이전까지 서술된 사료에 의한 연구 대상과 과거의 산물로 취급된다. 결국 기억의 장소는 상이한 두 개념 사이를 충돌시키는 지점이자, 우리가 기억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없을 때 의도적으로 만들어지는 장치다. 이러한 특성은 기억의 장소가 인류에 있어 기억과 역사가 개별적으로 하는 일 이상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지정해준다. 탈구조에 의해 중세까지 종교가 강하게 지배해왔던 공동체적 기억 환경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시대에서, 노라는 물리적 장소와 상징, 제도를 넘어 문학 작품을 비롯한 예술적 매체 또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매개로 작용한다고 본다. 기억을 의식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형성된 모든 물리적, 상징적 매개 장치가 ‘기억의 장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노라는 집단을 역사(history)의 집결지로 보는 것이 아니다. 노라에 따르면 집단은 기억(memory)이 응축되는 장소, 즉 유적과 기념물, 상징물 등을 통해 자발적으로 재구성된다. 결국 근대 이후 자연스러운 기억의 환경이 약화되며 현대에 들어서는 장소와 의례 같은 인위적인 기념 장치가 기억의 보존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피에르 노라가 역사와 기억의 이분법적 구조를 통해 기념비적인 장소성을 중시하는 집단 기억을 주장했다면, 아스만은 이에 더불어 집단 기억에 층위 구분을 시도한다. 얀 아스만(Jan Assmann)은 문화 간 기억 전승을 주로 연구한 사학자로, 집단 기억 이론에 있어서 방대한 연구의 한 축을 형성했다. 아스만은 집단 기억을 크게 의사소통적 기억과 문화적 기억으로 세분화한다. 의사소통적 기억은 일상적 상호작용에 기반 한 비공식적 기억으로, 주로 구전과 담화를 통해 전승된다. 아스만은 구전, 즉 의사소통의 방식이 3-4세대 정도의 시간 지속성을 가진다고 본다. [5] 반면 문화적 기억의 경우 텍스트와 기념물, 이미지 같은 상징적인 매체에 의해 외재화 되어 보존되고 재현되는 기억을 의미한다. 박물관과 도서관 등 공식적으로 기록물을 보관하는 집단이 이에 개입하기에, 이는 매우 형식적이다. 문화적 기억은 공식적 자료를 보존해내기에 세대를 장기적으로 수용할 수 있으며, 공동체 정체성을 형성하기도 한다. 의사소통적 기억이 개인의 차원에서 시작하여 약 100년 정도의 지속성을 가지는 반면, 문화적 기억은 집단의 차원으로 형성되어 영구적인 지속성을 가진다는 의의를 가진다.
따라서 아스만에게 있어 ‘아카이빙’은 매우 중요한 절차가 된다. 그는 인간의 기억이 대면 상호작용과 외적 기호체계라는 두 경로로 성립된다고 주장하며 문자화와 기록화가 비로소 인류의 문화적 기억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앞선 두 사상가가 장소의 중요성을 규정하며 역사적 관점에서 집단 기억을 분석했다면, 동시기의 아비 바르부르크는 이들보다 특히 예술적 시선에서 집단 기억을 분석하고자 했다. 물론 노라와 아스만 또한 사료의 중요성을 시사 하기에 예술이 문화 정체성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바르부르크의 연구는 특히 이미지의 후생 개념을 제시하며 집단 기억과 시각 예술의 연관성을 이끌어낸다.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는 미술사학자이자 문화연구자로서 기표와 기의를 비롯한 시각 예술의 이미지성을 주로 연구했다. 그는 집단 기억의 개념 그 자체가 예술의 매체(medium for art)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바르부르크는 이미지의 핵심 도상 공식으로서 파토스-포뮬라(Pathosformel)를 제시한다. 파토스-포뮬라는 시대와 매체를 횡단하며 반복해서 재현되는 감정의 형식화된 도상이다. [6] 그는 특히 고대의 격정적인 표현들이 공식화되어 르네상스와 근현대 이미지 속에서 되살아난다고 분석하며 과거와 현재를 도상 공식을 통해 연결시킨다. Pathos Formula는 공동체가 반복해서 호출하는 공통된 감정을 매개 가능한 형식으로 해석한다. 이는 공공기억의 시각적 이미지로 해석될 수 있다. 앞서 노라가 기억의 장소, 아스만이 기억의 층위를 주로 분석했다면, 바르부르크는 작품 내부의 도상과 상징에서 인류 공통의 감정과 정동의 계보를 추적한다. 특정 장소성을 넘어 형식의 구체적 시각화 방안을 모색하며 바르부르크는 집단 기억을 시각화하는 실천적 방법에 도전한다.
결론적으로 1920년대 모리스 할브바흐스가 개인 심리의 차원을 넘어 집단기억을 개념화한 뒤 20세기 후반에는 피에르 노라가 ‘기억의 장소’를 통해 기억과 역사의 이분법적 구조에서 기억의 개념을 확립해내고 이를 얀 아스만이 의사소통적 기억과 문화적 기억이라는 층위로서 정밀화시켰다. 동시기 미술사적 연구에서 아비 바르부르크는 고전 도상의 후생(Nachleben)과 파토스-포뮬라(Pathosformel) 개념을 차용해 정동이 형식으로 응축·전이되는 시각적 메커니즘을 해부함으로써, 집단적 기억이 예술 이미지의 형식과 배치 차원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즉, 노라·아스만이 장소·제도·매체의 차원을, 바르부르크가 이미지-형식과 정동의 계보를 부각하며 서로 상보적 시야를 제공한 셈이다.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시기를 거치면서, 기억의 학문적 연구가 장소기반 예술과 기억 실천으로 확장되는 시도가 활발해졌다. 에드워드 케이시(Edward S. Casey)는 기억을 시간 범주에만 두지 않고 장소에 매개된 수행으로 파악함으로써, 공적 기억이 특정 장소에서 허용, 배제 및 갱신되는 방식을 철학적으로 조명한다. 에드워드 케이시가 대표하는 현대 집단 기억 연구를 국내 연구자인 김정혜는 한국의 사례에 적용해 풀어낸다. 난지도 연구 등 도시 재생과 현장 특정 예술을 중심으로 한 연구는 비가시적 역사와 폐기의 기억이 장소정치와 맞물려 드러나는 과정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7] 이처럼 국내외 현대 연구자들에 따르면 공적 기억은 장소에서의 반복적 수행을 통해 구성·갱신되며, 그 반복은 점차 정체성의 범주를 정교화·확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동시대 예술가들의 과정적 실천은 지워진 시선의 복원과 더불어, 현재의 공동체를 새로운 기억의 지평 내로 호명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
III. 지워진 것을 재조명하는 소환으로서의 동시대 예술
동시대 미술은 장소 매개를 통한 집단 기억 보존을 실천하고자 다방면의 수행을 이어나가고 있다. 특히 소수자성이 주목받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궤를 같이 하며, 동시대 미술은 역사 속에서 지워지거나 소외되어 왔던 주체들에 주목한다. 동시대 장소 매개 미술은 과거의 소수자를 재가시화 하며 그들의 기억을 현대적으로 갱신한다.
1. 해외 — 장소를 통한 집단기억의 재가시화: 볼탄스키·보디치코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과거의 소수자를 재가시화하려는 움직임은 해외에서 먼저 본격화되었다. 각 문화권이 겪은 역사적 조건이 상이한 만큼, 다양한 국가의 예술가들이 집단기억을 ‘장소’라는 매개로 호출 및 재구성해 왔다. 그중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적 장소성 미술의 공통 경향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크리스티안 볼탄스키(Christian Boltanski)와 크리슈토프 보디치코(Krzysztof Wodiczko)를 들 수 있다.

크리스티안 볼탄스키의 〈The Missing House〉는 제2차 세계대전 공습으로 사라진 주거 건물의 부재를 그대로 남겨 두 건물 사이의 빈자리로 제시하고, 그 벽면에 해당 시기 거주했던 이들의 정보를 명패로 표기한 공공 설치물이다. 작품은 나치 시기의 강제 이주와 학살, 그리고 특히 1945년 공습으로 희생된 주민들의 삶을 현재의 도시 표면에 되돌려 놓으며, 파괴된 일상 공간 자체를 기억의 장치이자 기념비로 전환한다. 이로써 베를린 미테 현장에서 과거와 현재가 접속되고, 동일한 장소 안에서 기억의 재활성화가 이루어진다. 특히 아스만이 제시한 의사소통적 기억이 개별 이름의 소환으로서 이루어지는 동시에 문화적 기억이 공간의 공적 기념 체계로서 제시되며 집단 기억의 두 요소가 교차하게 된다. 볼탄스키의 작품에서는 집단 기억의 가시화 과정으로 문화적 기억이 갱신되는 동시에, 소외되었던 주민들이 주체로 승격된다. 이로써 잊힌 시선들을 현재의 공적 기억으로 편입시키는 윤리적 실천이 수행된다고 볼 수 있다.

보디치코는 전쟁기념물과 공공건축의 외벽에 미디어 파사드를 투사하여 제도적 기념물의 표면에 현존하는 당사자들의 증언을 겹쳐 놓는 방식으로 공적 기억의 장을 재구성한다. Soldiers and Sailors Civil War Memorial투사 작업은 영웅주의적 서사가 각인된 기념비 표면 위에 이주민·주거 취약계층·전쟁 트라우마 생존자의 얼굴과 목소리를 실시간으로 접속시켜 기념의 언어를 말할 권리가 있는 주체에 주목한다. 이때 야간에 투사한 미디어 파사드를 통해 도시의 외벽이 임시적 기억의 장소로 변환되며, 기념의 장치가 다층화 된다. 또한 당사자 증언이라는 의사소통적 기억이 기념비 표면으로 설명되는 문화적 기억과 동일 좌표에서 교차함으로써, 두 기억 층위 사이의 부유하는 간극이 일시적으로 메워진다.
요컨대 두 사례는 장소-장치와 참여-수행의 결합을 통해 동시대 예술이 집단기억을 작동시키는 방식을 선명히 보여준다. 이때 장소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행위를 촉발하는 매개이자 기록과 증언이 만나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관람자는 작품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객체의 위치에서 주체로 승격되며 작품이 제시하는 소외된 주체와 교류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의사소통적 기억과 문화적 기억의 간극이 동일 장소에서 과거–현재의 층위로 중첩되어 가시화되고, 기억의 주체에 대한 윤리적 질문과 시선의 권력 재배분이 재검증된다.
2. 국내 – 장소를 통한 집단기억의 재가시화: 정은영, 박경근, 조민석
이러한 프레임은 한국적 맥락에서도 유사하게 작동한다. 동시대 한국 미술은 지워진 시선을 복원하려는 예술적 시도를 후기식민주의 맥락을 통해 이어오고 있다. 대다수 해외의 집단 기억성 장소 예술 사례가 전쟁과 소수자에 초점화 되어 있다면, 한국의 사례는 상당히 다층적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의 문화는 일제의 지배 아래 제3세계의 문화로 이해되며 그 역사를 온전히 보존할 수 없었다. 향토색 연구를 통해 조선 미술을 보존하고자 한 일부 미술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워버린 역사의 한 부분을 채우기는 어렵다. 그러나 동시대 예술은 지워진 한국 미술과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내며, 잊혀진 민족의 기억과 시선을 미학적으로 복원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8]
대표적으로 정은영은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통해 한국 근대 연극사에서 배제된 여성 예술가들의 흔적에 복원을 시도한다. 2008년부터 지속된 <여성국극 프로젝트>는 해방 이후 근대국가로의 발돋움에 따라 태동하고 쇠퇴한 특수한 장르를 다룬다. 해당 프로젝트에서는 성별 관념과 전통의식에 드리운 억압과 사회적 통념을 비판적으로 해체하고자 시도하면서 근대적 여성국극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한때 여성 전유물로서의 유흥이었던 여성국극은 1960년대 말 여성 농락의 감소와 미디어 매체의 확대 영향으로 쇠퇴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시기 퀴어 담론이 활성화되며, 여성국극은 퀴어공연이라는 맥락으로 관객과 소통하며 재부흥의 역사를 맞이한다. 여성국극이 제시하는 공연은 성별이라는 고정적 개념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흔들어둔다. 특히 여성국극 남역 배우들의 남성 되기 수행은 퀴어적 정체성과 포스트휴먼적 신체론 논의와 연결되어 현대가 포괄하는 정체성의 유동성을 재조명한다. 결국 문화의 흥망성쇠에 의해 소외되었던 여성국극의 여성 정체성은 현대의 페미니즘, 퀴어 이론과 맞물려 신체와 정신, 성적지향성의 고정관념에 공격을 가하게 된다. [9]
앞선 정은영의 사례가 실존하는 장소성 그 자체보다는 관념적인 연극의 현장을 장소로 제시했다면, 박경근의 다큐멘터리 《청계천 메들리》는 도시 개발 이면의 목소리를 청취하는 비판적 응시로서 명확한 장소성을 제시한다.

박경근의 다큐멘터리 《청계천 메들리》는 도시 재개발로 사라져 가는 영세 철공소와 장인들의 일상을 소리·리듬·반복 제스처로 포착한다.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고철 공장을 운영하던 할아버지가 서울 청계천에 정착했던 기억을 현재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 —소규모 금속 작업장만 남은 청계천의 풍경—과 나란히 조명한다. [10] 이때 화면과 음향은 단순 기록을 넘어 장소 자체를 기억의 장치로 재전유하는 미학적 수행으로 기능한다. 철공 노동의 제스처가 정동의 형식으로 반복되며 시대와 매체를 건너 지속되는 방식을 통해, 기억은 시청각적 형식으로 가시화된다. 결국 소멸 위기의 도시 공간과 집단은 지워진 지역 기억의 호출로서 재구성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조민석의 《한반도 오감도》는 사라져가는 도시 공간을 새로운 의미망 안에 재배치하며, 지워진 기억을 소환하는 건축적 실천이었다. 2014년 제14회 베니스 국제건축전 한국관에서 전시된 해당 작품은 시인 이상의 시 오감도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다.


조민석은 기존의 조감도(bird’s-eye view) 개념을 전복하며 분단된 한반도의 복합성과 파편화를 시각화했다. 특히 방대한 리서치를 바탕으로 남북의 상이한 근대성과 도시건축을 병치하여 새로운 한반도 서사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역사적 공간인 한반도를 아카이빙하고 이를 통해 분단 이후의 역사를 재해석했다. 이 과정에서 전쟁사로 인해 소외되었던 한민족의 서사는 그 위상을 되찾는다. [11]
정은영의 여성국극이 인류 정체성에 초점을 두었다면, 박경근과 조민석의 사례는 한반도라는 지정된 장소에서 발생한 인류에 주목한다. 박경근이 전쟁 전후로 발생한 장소 내의 개인들의 목소리를 중점화시켰다면, 조민석은 한반도라는 공간에서 살아온 한민족 집단을 주제로 두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 모두 기억의 소외된 주체를 재호명함으로써, 시선의 불균형을 교정하려는 목적성을 띈다는 것이다. 이들 작업에서는 과거부터 등한시 되거나, 현대로의 전환 과정에서 소외된 근대적 주체가 현대적 개념과 결합되어 재해석된다.
IV. 결론
결국 동시대 예술에서 장소에 대한 응시는 과거를 단순히 복원하려는 회고가 아니라, 지워진 기억을 호출하고 새로 쓰기 위한 수행적 염원이다. 집단적 기억을 표명하는 공공예술은 감춰진 시선들을 미학적으로 복원하며, 사회적 기억의 구조를 재조직하는 실천적 수행으로 기능한다. 이는 미술이 여전히 사회의 감각기관으로 작동하며, 잊힌 것들을 다시 보이게 만드는 윤리적 소명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에 지워졌던 문화와 역사적 순간들은 현대의 장치와 수행을 통해 비로소 가시화 기회를 획득한다. 이때 중요한 과업은 이러한 재가시화가 새로운 배제나 전유로 기울지 않도록 절차를 정교화하고, 기억의 선택과 망각의 경계를 지속적으로 성찰하는 일이다. 요컨대, 장소를 매개로 한 예술의 실천은 오늘의 공동체가 과거와 맺는 관계를 갱신하며, 미래의 기억을 설계하는 공적 인식의 장치로서 그 의미를 굳건히 한다. 결국 동시대 예술의 집단적 기억 가시화는 의사소통적 기억과 문화적 기억의 교차를 설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현장 기록, 증언 수집을 비롯한 제도적 보존의 연동을 통해 포괄적이고 지속 가능한 기억 체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1] 배혜정, 김홍중, 「집단적 기억 개념을 통한 동시대 한국 미술 사례 분석—‘만들어진 전통’의 전복과 비물질적 기념비—」, 『예술과 미디어』 16, no. 2(2017): 97–120.
[2] Henri Bergson, Matter and Memory, trans. N. M. Paul and W. S. Palmer (New York: Zone Books, 1991), 서론; 제1장.
[3] Maurice Halbwachs, On Collective Memory, (UChicago, 1992), 38.
[4] Pierre Nora, Between Memory and History, (Representations 26, 1989), 7–24.
[5] Jan Assmann, Cultural Memory and Early Civilization: Writing, Remembrance, and Political Imaginatio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6] 조한렬. 「아비 바르부르크의 ‘파토스정형’과 집단적 무의식」, 『헤세연구』 31 (2014): 257-275.
[7] Kim, J.H. Waste and Urban Regeneration: An Urban Ecology of Seoul’s Nanjido Post-landfill Park (1st ed.). (2020, Routledge).
[8] 배혜정, 김홍중, 「집단적 기억 개념을 통한 동시대 한국 미술 사례 분석—‘만들어진 전통’의 전복과 비물질적 기념비—」, 『예술과 미디어』 16, no. 2(2017): 97–120.
[9] Arts Council Korea (ARKO), “정은영 — The Korean Pavilion (58th International Art Exhibition, La Biennale di Venezia),” The Korean Pavilion, accessed August 31, 2025, https://arko.or.kr/pavilion/19pavilion/kr/artist1.html
[10] 영화진흥위원회 (KOFIC), “청계천 메들리 (2010),” Korean Film Biz Zone (KoBiz), https://www.koreanfilm.or.kr/eng/films/index/filmsView.jsp?movieCd=20101243.
[11] 국립현대미술관 (MMCA), “미술연구-도시와 아카이브 (Research Archive),” https://www.mmca.go.kr/research/archiveSpInfo.do?type=C&collect_id=1000050&museum_id=00001&archiveFlag=S.
참고문헌
- 배혜정, 김홍중. 「집단적 기억 개념을 통한 동시대 한국 미술 사례 분석—‘만들어진 전통’의 전복과 비물질적 기념비—」. 『예술과 미디어』 16, no. 2 (2017): 97–120.
- Bergson, Henri. Matter and Memory. Translated by N. M. Paul and W. S. Palmer. Zone Books, 1991. Originally published 1896.
- Halbwachs, Maurice. On Collective Memory. Translated by Lewis A. Coser.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 Nora, Pierre. “Between Memory and History: Les Lieux de Mémoire.” Representations 26 (1989): 7–24.
- 조한렬. 「아비 바르부르크의 ‘파토스정형’과 집단적 무의식」. 『헤세연구』 31 (2014): 257–275.
- Kim, Jeong Hye. Waste and Urban Regeneration: An Urban Ecology of Seoul’s Nanjido Post-landfill Park. Routledge, 2020.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ARKO). “정은영 — The Korean Pavilion (58th International Art Exhibition, La Biennale di Venezia).” The Korean Pavilion. Accessed August 31, 2025. https://arko.or.kr/pavilion/19pavilion/kr/artist1.html.
- 영화진흥위원회 (KOFIC), “청계천 메들리 (2010),” Korean Film Biz Zone (KoBiz), https://www.koreanfilm.or.kr/eng/films/index/filmsView.jsp?movieCd=20101243.
- 국립현대미술관 (MMCA), “미술연구-도시와 아카이브 (Research Archive),” https://www.mmca.go.kr/research/archiveSpInfo.do?type=C&collect_id=1000050&museum_id=00001&archiveFlag=S.
도판
(도 1) 크리스티안 볼탄스키(Christian Boltanski), The missing house, 1990. 공공 설치(명패). 독일 베를린 미테, 그로세 함부르거 슈트라세 15/16.
(도 2) 크리슈토프 보디치코 (Krzysztof Wodiczko), Public Projection: Homeless Projection 2 (Soldiers and Sailors Civil War Memorial, Boston), 1986–1987. 야외 비디오 프로젝션.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Soldiers and Sailors Civil War Memorial.
(도 3) 정은영,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2019. 다채널 오디오비주얼 설치, 가변 크기.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도 4) 박경근, 《청계천 메들리: 철의 꿈》, 2010. 디지털 비디오, 79분; 영화 스틸.
(도 5) 조민석, 《한반도 오감도》, 2014. 전시 설치(설치전경), 가변 크기. 제14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